아버지의 존재와 비존재

몇년 전 한국에서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라는 책이 나온 적이 있다. 내용은 김수환 추기경, 법정 스님을 비롯한 각계 인사들이 자신의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어린 시절을 돌아보는 글들이다.
어떤 어머니는 단칸방에서 삯바느질을 해가며 6남매를 키웠는가 하면 집에 쌀이 떨어져 이웃집에 가 품팔이를 하는 것도 그려져 있다. 또 여류작가 S씨는 자신의 어머니가 소실이었기 때문에 겪은 서러움, 그리고 P씨는 이와는 반대로 아버지가 첩을 집으로 데리고 들어와 앞뒷 방에서 같이 살아본 고통 등을 회고하는 내용도 담겨져 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어머니의 사랑도 사랑이지만 아버지의 가정에 대한 무관심이다. 우리의 아버지들은 하나 같이 “나는 죄인이로소이다”의 부류에 속하는 남성들이며 요즘 같으면 전부 어린이 학대죄로 경찰에 연행될 수 있는 정도다. 한국의 아버지들은 왜 비가정적인가. 왜 그렇게 무뚝뚝한가에 대한 질문에 “가정적인 아버지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라는 답이 저절로 나온다.
아버지 노릇은 책에서 읽는 것만으로는 안되고 가정에서 부모들이 시범을 보여야 몸에 밸 수 있게 된다. 못 본 것은 흉내낼 수 없는 법이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결혼기념일 장미꽃을 갖다주는 것을 본 적이 없는 아들에게는 그와 같은 부부애정 표시가 어색하게 느껴지게 마련이다. 생각은 있는데 행동이 따라 주지를 않는다.
아버지의 사랑은 대부분 조건적 사랑이다. 자식이 좋은 대학에 들어갔다거나, 사법시험에 합격했거나 남부러운 직장에 취직이 되었을 때 자랑스럽게 여기며 자식에 대해 애정을 표시한다.
반면 자식이 말썽을 일으키거나 사회경쟁에서 패배자적인 면을 보이면 싫어하고 비윤리적인 큰 실수를 저지르면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라는 소리까지 거침없이 하게 된다.
인도주의자로 불리는 간디도 자식에게는 비인도적인 아버지상을 보였다. 그는 말썽만 일으키는 아들을 미워했으며 “나는 그 애를 아들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공공연히 언급했다. 이에 대한 반발로 아들 하릴랄은 힌두교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해 힌두교 지도자인 간디의 얼굴에 먹칠을 해놓았다. 두 사람은 죽을 때까지 화해하지 않았다.
요즘의 젊은 아버지들-우리들의 자녀 세대-은 전혀 다르다. 이들의 자식 사랑은 조건적이라기보다 어머니의 사랑처럼 무조건적이며 다정다감하고 가정적이다. 언론계만 해도 과거에는 부인이나 자녀들과의 약속 때문에 회식에 빠지는 기자는 ‘못난 놈’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지금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풍토다. 어머니보다 아버지 쪽에서 아이들을 더 감싸 도는 인상이다. 한국인들의 아버지상이 180도 변했다.
그러나 새로운 문제가 젊은 아버지들의 세대에서 떠오르고 있다. ‘아버지 부재’ 문제다. 아이들을 버리고 떠나는 아버지들의 숫자가 나날이 늘고 있는 것이다. 여권이 신장됨에 따라 이혼율도 늘고 사생아도 점점 증가하는 추세다. 이혼은 아내와 헤어지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자식과도 헤어지는 것을 뜻한다. 아버지들이 다정다감하고 가정적인 것은 사실이나 자식 옆을 떠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인플루엔자가 없어지나 했더니 사스가 등장한 셈이다.
미국 어린이들 중 36.6%가 아버지와 헤어져 살고 있다. 흑인사회에 갱 문제가 심각한 것도 아버지 부재와 정비례한다. 결혼식장에서 혼자 걸어 들어가는 신부의 수가 점점 늘고 있다. 아버지가 차라리 죽었더라면 자식들의 가슴속에라도 자리잡고 있었을 텐데 자식을 버리고 가게 되니 ‘아버지’가 평생 자식들에게 한을 남기는 존재로 탈바꿈하고 있다.
‘아버지 날’에 다시 생각해야 할 오늘의 문제는 아버지의 가정적인 성격 여부가 아니다. 아버지의 존재와 비존재가 자녀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 이다.